[사자성어] 노겸군자(勞謙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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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6-20 09:11 조회8,9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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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 프로에 보면 인기요리사가 라면을 이용한 ‘탄탄면’을 쉽게 조리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 준다. 물을 500cc 정도 팔팔 끓인 후, 우선 면과 플레이크를 넣고 2분 정도 끓인 다음 국물을 반 정도 줄이고, 라면 수프와 땅콩버터 한 숟가락을 넣어 풀어 주면서 계속 끓인다. 그 다음에 대파와 고춧가루를 적당히 넣고 약 1분간 잘 섞어주면 탄탄면이 완성된다. 보통 때 먹는 라면 맛과 다르게 고소하고 매콤하여 식감이 뛰어나서 별미다. 단, 국물이 적은 만큼 짜지 않게 수프를 조절하면 좋다.
노겸군자(勞謙君子), 요즘에 큰일 하고도 겸손해하는 지식인 보셨어요?
참으로 묘(妙)한 일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묘한 일을 많이 겪는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최근에 친구 아들 혼례 청첩장을 받고 예식장에 갔다. 신랑 신부가 나란히 서서 하객에게 인사를 하는데 참으로 한 쌍의 원앙처럼 아름답고 행복해 보여 축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여태까지 내가 본 신랑 신부가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역시 신랑이 신부보다 조금 커서 신체적 차이가 나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십여 년 전에 한자 妙(묘) 자를 풀이하면서 생긴 의구심이라 할까, 묘할 묘(妙) 자가 묘하다고 생각한 이래 내 의식에는 묘(妙)한 것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생겼다. 妙(묘)자는 여자 女(여)자와 적을 少(소)자의 합자이다. 같은 사람이고 남녀평등인데 남자보다 여자[女]가 키나 몸무게가 적다[少]는 것이 묘(妙)하다는 뜻으로 된 것을 알고부터 더욱 묘(妙)자에 신경이 쓰였다.
이미 삼국시대 때 최치원 선생이 쓴 ‘난랑비서문’에 보면 나라에 풍류(風流)라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다고 말씀한 바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성리학(性理學)이 중시되어 원리(原理)와 기질(氣質)이 분리된 것도 아니요 섞인 것도 아니라는 이기지묘(理氣之妙)가 선비들의 화두가 되었고, 종교적으로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있는가 하면 평안북도에 단군이 왕림하였다는 묘향산(妙香山)이 있지 않은가, 세상사에는 이 외에도 신묘(神妙)하고 기묘(奇妙)하고 오묘(奧妙)한 일이 매우 많다.
이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미쳐 묘한 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고 주어진 일상에서 기계부속품처럼 하루하루 살다가 천수(天壽)를 누리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제멋대로 과욕(過慾)을 부리다가 사람을 헤치고 속이고 죽이고 철창으로 끌려 들어가 수명을 단축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뒤늦게 철이 들어 자신을 깨닫거나 과거를 후회하고 수도(修道)하며 새 인생을 보람 있게 설계하는 의지의 사람도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극복의 의지를 갖도록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육의 참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인류의 선각자(先覺者)들은 광활한 하늘을 살펴보고 춘하추동의 천시(天時)를 알아냈고, 드넓은 동서남북의 대지를 밟으면서 지리(地利)를 체험하였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길흉화복을 넘어 인화(人和)를 강조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진리를 가까이 한 사람이 성군(聖君)이요 성인(聖人)이요 성직자(聖職者)이다. 대표적인 이야기를 들면 공자는 ‘자기를 이기고 예로 밟아가라[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적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인용하여 전했고, 석가모니는 고행 수도 끝에 얻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박애 사상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남겼으니 이 교훈은 하나같이 노겸군자(勞謙君子)의 표상이다.
노겸군자라는 말은 『周易(주역)』 64괘 중 15번째인 지산겸괘(地山謙卦)의 셋째 효(爻)에 나온다. 산의 위용은 땅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데 비해 지산겸괘는 땅 아래에 산으로 구성되어 있어 땅 밑에 바짝 몸을 낮추어 겸손함의 극치를 보인다.
실제로 성군(聖君)과 성인(聖人)으로 역사의 큰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돌이켜보면 평생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힘쓴 근로(勤勞)의 화신이었다. 고난과 시련을 감수하면서 자기희생을 하며 최선을 다했다. 땅 아래로 자신을 기꺼이 낮추어 지산겸괘 그대로 실천한 분이다. 겸괘의 괘사(卦辭)를 해설한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적이 있어도 자기의 덕으로 여기지 않으니 후덕함이 지극하도다.” 이는 도덕 사회의 인격체로서 전형적인 표본 같다고 하겠다.
지금 현대사회는 서양 풍조의 극치로서 자기 PR시대라고 한다. 마치 상품광고를 선전해서 구매의욕을 불러일으켜 매출을 올리듯이 사람의 명성도 광고 선전함으로서 지명도와 선호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새 상품과 새 인물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만들어진다. 그러나 새 상품은 바뀔수록 좋아지나 새 인물은 그렇지 못한데서 문제가 되고 있다. 권력이나 금력에 의존해 만들어진 인물이나, 남으로 하여금 만들어지고 길들어진 인물은 반짝하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지기 쉽다.
새 인물은 노겸군자와 같이 스스로 자기의 소임을 알고 봉사와 희생정신을 가지고 사람에게 감동을 전함으로서 오래 지속한다. 그래서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이듯이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 많아져야 하고, 정부의 문화교육 정책은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기술과 기능을 최대한 가르치고 펼치도록 장려하는 만큼 기본적으로 노겸군자의 덕성을 더불어 배양하도록 인성교육을 병행해야 상호 간에 겸손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성숙하게 되어 국민과 국가를 위해 올바른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무위자연(無爲自然) >
노겸군자(勞謙君子), 요즘에 큰일 하고도 겸손해하는 지식인 보셨어요?
참으로 묘(妙)한 일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묘한 일을 많이 겪는다. 그럴 때마다 왜 그렇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최근에 친구 아들 혼례 청첩장을 받고 예식장에 갔다. 신랑 신부가 나란히 서서 하객에게 인사를 하는데 참으로 한 쌍의 원앙처럼 아름답고 행복해 보여 축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여태까지 내가 본 신랑 신부가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역시 신랑이 신부보다 조금 커서 신체적 차이가 나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십여 년 전에 한자 妙(묘) 자를 풀이하면서 생긴 의구심이라 할까, 묘할 묘(妙) 자가 묘하다고 생각한 이래 내 의식에는 묘(妙)한 것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생겼다. 妙(묘)자는 여자 女(여)자와 적을 少(소)자의 합자이다. 같은 사람이고 남녀평등인데 남자보다 여자[女]가 키나 몸무게가 적다[少]는 것이 묘(妙)하다는 뜻으로 된 것을 알고부터 더욱 묘(妙)자에 신경이 쓰였다.
이미 삼국시대 때 최치원 선생이 쓴 ‘난랑비서문’에 보면 나라에 풍류(風流)라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다고 말씀한 바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성리학(性理學)이 중시되어 원리(原理)와 기질(氣質)이 분리된 것도 아니요 섞인 것도 아니라는 이기지묘(理氣之妙)가 선비들의 화두가 되었고, 종교적으로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있는가 하면 평안북도에 단군이 왕림하였다는 묘향산(妙香山)이 있지 않은가, 세상사에는 이 외에도 신묘(神妙)하고 기묘(奇妙)하고 오묘(奧妙)한 일이 매우 많다.
이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미쳐 묘한 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고 주어진 일상에서 기계부속품처럼 하루하루 살다가 천수(天壽)를 누리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제멋대로 과욕(過慾)을 부리다가 사람을 헤치고 속이고 죽이고 철창으로 끌려 들어가 수명을 단축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뒤늦게 철이 들어 자신을 깨닫거나 과거를 후회하고 수도(修道)하며 새 인생을 보람 있게 설계하는 의지의 사람도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극복의 의지를 갖도록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육의 참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인류의 선각자(先覺者)들은 광활한 하늘을 살펴보고 춘하추동의 천시(天時)를 알아냈고, 드넓은 동서남북의 대지를 밟으면서 지리(地利)를 체험하였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길흉화복을 넘어 인화(人和)를 강조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진리를 가까이 한 사람이 성군(聖君)이요 성인(聖人)이요 성직자(聖職者)이다. 대표적인 이야기를 들면 공자는 ‘자기를 이기고 예로 밟아가라[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적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인용하여 전했고, 석가모니는 고행 수도 끝에 얻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박애 사상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남겼으니 이 교훈은 하나같이 노겸군자(勞謙君子)의 표상이다.
노겸군자라는 말은 『周易(주역)』 64괘 중 15번째인 지산겸괘(地山謙卦)의 셋째 효(爻)에 나온다. 산의 위용은 땅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데 비해 지산겸괘는 땅 아래에 산으로 구성되어 있어 땅 밑에 바짝 몸을 낮추어 겸손함의 극치를 보인다.
실제로 성군(聖君)과 성인(聖人)으로 역사의 큰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돌이켜보면 평생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힘쓴 근로(勤勞)의 화신이었다. 고난과 시련을 감수하면서 자기희생을 하며 최선을 다했다. 땅 아래로 자신을 기꺼이 낮추어 지산겸괘 그대로 실천한 분이다. 겸괘의 괘사(卦辭)를 해설한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적이 있어도 자기의 덕으로 여기지 않으니 후덕함이 지극하도다.” 이는 도덕 사회의 인격체로서 전형적인 표본 같다고 하겠다.
지금 현대사회는 서양 풍조의 극치로서 자기 PR시대라고 한다. 마치 상품광고를 선전해서 구매의욕을 불러일으켜 매출을 올리듯이 사람의 명성도 광고 선전함으로서 지명도와 선호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새 상품과 새 인물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만들어진다. 그러나 새 상품은 바뀔수록 좋아지나 새 인물은 그렇지 못한데서 문제가 되고 있다. 권력이나 금력에 의존해 만들어진 인물이나, 남으로 하여금 만들어지고 길들어진 인물은 반짝하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지기 쉽다.
새 인물은 노겸군자와 같이 스스로 자기의 소임을 알고 봉사와 희생정신을 가지고 사람에게 감동을 전함으로서 오래 지속한다. 그래서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이듯이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 많아져야 하고, 정부의 문화교육 정책은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기술과 기능을 최대한 가르치고 펼치도록 장려하는 만큼 기본적으로 노겸군자의 덕성을 더불어 배양하도록 인성교육을 병행해야 상호 간에 겸손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성숙하게 되어 국민과 국가를 위해 올바른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무위자연(無爲自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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